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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산책] ‘텍스트힙’에 이어 ‘라이팅힙’: 지금 라이팅이 힙해지는 이유는?

  • 작성자 사진: 준걸 김
    준걸 김
  • 1일 전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51분 전

서울국제도서전과 인벤타리오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

스타일리시한 소비 트렌드가 된 수집과 기록 행위


지난 4월 2일부터 5일간 코엑스 더 플라츠홀에서 열린 ‘인벤타리오: 2025 문구 페어’는 올해가 첫 행사라는 게 이례적일 정도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입장권은 온라인 사전 판매 개시 3일 만에 매진됐으며 행사 기간 내내 오픈런을 위한 대기줄이 길게 늘어선 진풍경이 펼쳐졌다. 손편지보다 이메일이 익숙한 요즘, 문구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왜 사람들은 여기에 열광하는 걸까?


글 | 서민경 텍스트공방 대표, 건국대학교 겸임교수

29CM와 포인트오브뷰가 공동 주최한 ‘인벤타리오: 2025 문구 페어’ © 29CM


필사노트 열풍에 문구도 빠질 수 없다

지난해부터 서울국제도서전에는 ‘텍스트힙(Text Hip)’이라는 수 식어가 따라다닌다. 종이책을 읽는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Z세대 사이에서 되레 독서가 힙하다는 인식이 퍼져 나가면서 서울국제도서전은 전년 대비 관람객 2만 명이 증 가했다고 한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텍스트힙 열풍에 불을 지폈다. 그런데 올해 성황리에 종료된 인벤타 리오 행사는 ‘텍스트힙’에 이어 ‘라이팅힙(Writing Hip)’의 시대가 열렸음을 확인시켜 준 자리였다. 독서라는 수동적 행위에 그치기보다는 좋아하는 문장을 필사노트에 옮겨 적는 능 동적인 글쓰기가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책의 손상을 방지 하기 위한 북커버, 읽은 위치를 표시하는 책갈피는 물론 필기감이 좋은 노트와 펜을 찾는 문구인들이 인벤타리오에 몰려든 것은 당연했다.

브랜드 69곳이 참여한 가운데 5일 동안 2만5,000명의 관 람객이 다녀간 인벤타리오는 물품 및 문건에 관한 기록물 과 목록을 뜻하는 스페인어에서 따온 행사명답게 ‘도구와 아이디어를 수집하는 거대한 저장소’를 콘셉트로 했다. 포 인트오브뷰, 흑심, 오이뮤처럼 오프라인 공간에 기반을 둔 브랜드는 물론, 온라인으로 폭넓은 팬층을 확보한 플래너 계 강자 모트모트, 감각적인 그래픽 패턴을 내세우는 모 스, 디지털 구독 서비스 롱블랙까지 한자리에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는 점에서 ‘페어’라는 형식이 가진 장점을 극대화한 행사였다. 문구라는 콘텐츠를 내세우고 문구인들의 취향을 저격하는 브랜드를 참가사로 유치하는 데 공을 들인 주최 측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고 할 수 있다.

지난해 교보문고는 필사책 판매량이 전년 대비 약 692% 상승했다고 발표했다. 손글씨로 또박또박 쓴 필사 노트 인 증이 소셜 미디어에서 유행하면서 ‘더 좋은 문장을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은 출간 즉시 종합 베스트셀러, 인문 분야 1위를 기록했다. 서점별 사은품 행사로 준비한 각종 문구류도 눈길을 끈다. 교보문고는 제트스트림 라이 트터치 볼펜, 예스24는 전구 클립, 알라딘은 문장부호를 담 은 핸드메이드 미니북을 옵션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한강 신드롬에 힘입어 문학동네는 한강 작가의 소설 3권과 필사노트로 구성한 ‘한강 스페셜 에디션’을 출시했고, 헌법 필사책, 노래 가사 필사책까지 등장할 정도로 필사 분야도 다양해지고 있다.  


디지털 디톡스를 위한 처방전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인들은 ‘첨필(stylus)’이라고 부르는 긴 막대기로 점토판을 긁는 방식으로 문자를 기록했다. 그래서 그리스어 ‘글 쓰다(graphein)’라는 단어에는 ‘각인하다’ ‘긁다’는 뜻이 담겨 있다. 글쓰기는 종이와 펜의 발명으로 표면에 ‘새기기’에서 ‘(색을) 입히기’의 형태로 발전했다. 철학자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는 저서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에서 필기구의 진화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힘을 덜 들이면서 더 빨리 쓸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담긴 역사라고 설명한다. 깃펜에서 만년필, 볼펜, 타자기, 워드프로세서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에서 글쓰기의 속도감이 느껴진다. 이어서 저자는 종이거래상(오늘날의 문구점)에서 판매되는 다양한 종류의 필기용 도구들이 그것을 이용해 문자화되는 글보다 더 위대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 도구에 의해 졸렬하게 쓰여진 것에서보다는 차라리 그 도구 자체에 얼마나 많은 지혜가 배어 있는가?”

프로파간다 출판사에서 펴낸 『연필깎이의 정석』은 장인의 혼을 담은 연필깎이 기술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일을 완벽하게 해내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전한다. 디지털이 지배하는 오늘날에도 장인처럼 꾸준히 한길을 걷는 문구 브랜드는 찬사를 받을 만하다. 디지털 디바이스 속에 담긴 전자책은 여러 모로 종이책의 경험을 모방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스크린 위에 손가락을 대고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쓸면 ‘샤르륵’ 하고 책장을 넘기는 사운드와 함께 다음 페이지가 펼쳐진다.

독서 경험만 디지털화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꾸밈으로 표현하는 ‘데코덴티티(Decoration+Identity)’에 몰입하는 다꾸러(다이어리를 꾸미는 사람들)을 겨냥한 디지털 다이어리 앱도 나온 지 오래다. 연말이면 종이 다이어리 증정 이벤트를 진행하는 스타벅스는 지난해 처음으로 이벤트 참여 고객을 대상으로 필기 앱 ‘굿노트’와 협업한 디지털 플래너를 추가 증정했다. 아이패드 위에서 자꾸만 미끄러지는 애플 펜슬의 필기감을 향상시키는 각종 종이 질감 필름의 인기도 식을 줄 모른다. 하지만 디지털 다이어리의 한정적 생태계는 오프라인에서 만날 수 있는 스티커, 마스킹 테이프, 필기구를 매개한 다채로운 경험에 비할 수 없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독서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어린 시절 독서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책의 내용보다는 그 책을 읽었던 시간과 장소의 이미지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관점은 종이책이 가진 물성과 그로 인해 촉발되는 경험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한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꾸미기 아이템을 고르고 잘라서 다이어리에 붙이는 과정은 디지털 다이어리 앱에서 디지털 펜슬로 톡톡 건드리고 끌어오는 단조로운 행동과 비교하기 어렵다. 필기감이 좋은 펜으로 필사노트 위에 꾹꾹 글씨를 눌러쓰는 시간은 문장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과정이기도 하다. 디지털 피로감이 충만한 이 시대에 수집과 기록을 매개로 하는 라이팅힙 트렌드는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좋은 문장을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 © 빅피시

한강 스페셜 에디션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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